‘한 사람’ 목회, 일생을 제자훈련에 바친 사람
은보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 일생
[2010.09.02 10:38]
|
|
▲서재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옥한흠 목사의 모습. ⓒ사랑의교회 제공
“제자훈련에 미친 사람”
옥한흠 목사를 한 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지난 1978년 사랑의교회 개척 이래 옥한흠 목사는 한 사람을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운다는 ‘제자훈련’ ‘평신도 사역’에 평생을 바쳤다.
2일 하늘로 돌아간 옥한흠 목사는 경남 거제 출신으로 증조부 때 기독교를 받아들인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이후 그는 성균관대와 총신대학원을 거쳐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신학석사,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종교 갈등 없이 자란데다 해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사실은 고초를 많이 겪었다고 한다.
그 시절 대다수가 겪은 가난을 깊이 체험한데다 군대 복무기간에 야간대학을 다니느라 폐결핵에 걸려 5년간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사랑의교회에서 한창 목회활동을 하던 시기인 1989년에도 병으로 쓰러져 1년간 목회를 쉬기도 했다.
선교단체 자료·프로그램 면밀히 연구
옥한흠 목사는 신학교 시절 전도사로 재직했던 서울 성도교회에서 학생 1명 뿐이던 대학부를 350명으로 부흥시킨 이력이 있다. 이때 영락교회 등 120여 교회에서 교역자와 학생들이 성도교회를 방문, 연구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옥 목사는 대학생들이 교회보다 CCC나 네비게이토 등의 선교단체에 몰리는 이유를 찾으려 이들의 자료와 프로그램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 결과 교리보다는 접근법에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다. 교회가 교리나 조직, 형식적인 예배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선교단체는 복음과 양육, 비전을 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복음 강조와 구성원 중심, 소그룹과 쌍방향 전달방식, 유기적 관계와 양육 위주 목회 등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은 이때의 연구로 다듬어졌다.
남산 밑에서 5년간 살았지만 유학을 떠나기 전 가족들을 한 번도 남산에 데려간 적이 없을 정도로 일에 열중했던 그의 일화는 유명하다. 유학 전날까지 대학부에 매달리다 아내의 이사마저 도와주지 못했다고 한다.
평신도를 깨우다
38세에 떠난 미국 유학에서 그는 제자훈련의 신학적 토대를 구축하는 한편, 제자훈련 현장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다. 제자훈련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네비게이토 본부를 찾아 자료를 수집하고 현장을 직접 체험했으며, 제자훈련을 접목시켜 성공한 교회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박사학위 논문도 제자훈련 관련 내용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옥 목사는 1978년 은평교회 배기주 목사 도움으로 서울 강남에서 첫 목회를 시작한다. 당시 성도는 단 9명. 5백여명 규모의 교회 청빙을 마다하고 개척을 택했던 그는 이들을 데리고 전도를 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들을 훈련시켰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강단에 서는 대신 둘러앉아 예배를 드렸으며, 가운조차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나온 책이 <평신도를 깨운다>인데, 여기에는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다. 평신도도 훈련시켜 제사장을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의 제자훈련은 결실로 나타나게 됐다. 개척 5년만인 1982년 성도 수는 250명으로 늘어났고, 1985년에는 1200명을 넘어서 현재 자리에 성전을 짓게 됐다. 주민들 반발로 지하에 예배실을 만들게 됐지만, 마당이 넓고 건물이 아담한 새로운 형태의 교회 건물로 그해 서울시 건축상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자훈련, 그리고 평신도의 ‘동역자’화
옥한흠 목사는 그의 지론인 제자훈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려는 목회적 노력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 28장 19-20절입니다. 예수의 제자를 만든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려는 크리스천을 만드는 것입니다. 단순히 천당에 가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과, 예수님을 닮겠다는 확실한 목표를 갖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요.”
제자훈련의 목적은 성경 지식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고 그는 강조한다. 성경공부는 수단일 뿐, 예수님처럼 인격이 성숙하고 거룩하며 헌신된 삶을 살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3년간 12명을 놓고 씨름하신 뒤 그들에게 전세계를 맡기고 떠나신 ‘제자훈련의 원리’다.
제자훈련을 거친 평신도를 ‘동역자’라고 강조한 것도 그였다. 평신도들을 목사를 돕는 시녀와 같은 위치에서 벗어나, 성경 말씀으로 사람들을 도와주고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작은 목사’의 역할을 해야 교회가 부흥된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의 ‘파종’은 열매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 사랑의교회에서 훈련을 마친 평신도 동역자는 3천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사회 각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파하고 있다.
사랑의교회 다락방 모임은 기존 일방통행식 구역모임과 달리 ‘쌍방향’이다. 훈련받은 순장이 순원들과 대화하면서 공부가 되고 생활에 적용하게 하기 위해서다. 대화식으로 진행되니 순원들은 자연스레 고민을 함께 나누면서 튼튼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다락방은 허심탄회한 대화를 위해 남녀를 따로 운영하지만, 특성에 맞게 교사, 신혼부부 등은 함께하기도 한다.
옥 목사는 제자훈련을 목회 현장에 접목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국제제자훈련원을 발족, 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와 후속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팩스나 이메일로 정보를 무료로 공유했고, <디사이플>이라는 월간지도 발행했다.
성공적인 사역계승, 제2의 도약을 낳다
옥한흠 목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역계승’이다. 여러 대형교회가 담임목사직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일을 놓고 안팎으로 시끄럽던 한국교회에 그의 조기은퇴와 오정현 목사로의 사역 ‘계승’은 신선했다.
옥 목사는 오 목사가 자신과 달랐기 때문에 후임으로 선택했다는 후일담을 전한다. 전임과 후임이 다르면 위험부담이 따르지만, 오 목사가 자기 기량을 최대로 살리는 대신 자신의 역할을 헤아려서 해 주면 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 역할은 ‘2선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사랑의교회가 25년 동안 저와 함께했는데 저와 비슷하거나 같은 사람을 또 모셔서 20-25년을 보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오 목사는 나와 목회철학만 같지 다른 부분은 너무 대조적입니다. 사랑의교회가 건강한 체질을 유지하려면 저와 다른 사람이 와서 목회하는 게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5년을 겪어보니 제가 판단한 게 맞았어요. 제가 목회할 때는 전체 분위기가 차분했는데, 지금은 뜨거워요.”
그는 은퇴 후 5년간 후배 목회자와 친했던 장로·권사, 몇년간 직접 훈련시킨 1500명의 평신도 순장들과도 거의 연락을 끊은 채 주일 첫 예배에 나와 뒷자리에서 예배를 드린 뒤 바로 돌아가곤 했다.
옥한흠 목사는 사랑의교회 역할과 장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교회가 세대교체를 하면서 좋은 이미지를 심었고 제가 은퇴하면서 주목의 대상이 됐죠. 거기에 오정현 목사가 신선함을 주면서 교회 때문에 방황하던 분들이 우리 교회에서 정착했어요. 하지만 이런 감동이 식은 지금부터의 사역이 시작입니다. 교회가 커서 좋을 거 없습니다. 이제부터 질적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회·국가·교회적으로 영향력이 미비하다는 게 마음 아프고 부족한 부분입니다. 책임지는, 영향력을 갖는 교회가 되어야지요.”
옥 목사는 은퇴 이후에도 국제제자훈련원 원장으로 활발히 활동했고, 지난 2007년 한국교회 대부흥 1백주년 기념대회에서는 피를 끓는 애통함으로 회개를 촉구하며 깊은 감동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러다 계속된 병환으로 입원 횟수가 늘어났고, 사랑의교회 전 성도들의 매일같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