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하나님께로,
그리고 그분이 바라시는 삶의 자리로 이끄는 성경읽기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는 성경이 힘겨운 현실의 유일한 대답임을 믿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 욕망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그리고 이 세대가 조장하는 욕망을 인정하면서 읽는 것이다. 구약 시대나 신약성경이 형성되던 시대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왔다. 강력한 능력자나 초인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그 말씀을 읽으며 자신을 넘어서 우리 앞서 구름 같은 증인의 대열에 합류했다(히 12:1).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는 이제 우리를 그 대열에 합류하도록 초대한다.
저자 : 김근주
들어가며
1.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성경읽기의 목적이다
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사람의 글이다
3. 비판적으로 읽기
4. 본문을 신학적으로 읽는다는 것
5.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본문의 시대와 오늘의 시대 이해하기
6. 성경 본문의 역사 본문의 배열과 편집이 본문 이해에 주는 의미
7. 구약과 신약의 관계(1):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8. 구약과 신약의 관계(2): 사랑으로 성취된 율법
9. 구약과 신약의 관계(3): 신약으로 성취된 구약
10. 구약으로 읽는 신약: 부활과 구원
11. 시대를 초월하는 성경해석
12. 밭에 감추인 보화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하지 않으면,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를 진리 자체와 혼동해 버리기 쉽고 그때마다 교회는 세상의 빛은커녕 세상의 재앙과 화근으로 전락하곤 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전혀 낯설지 않다.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는 진리 자체와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 사이의 간격을 고민하는 글들의 모음이다. 이런 저런 주장들이 있지만, 이 작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 말씀이 오늘 우리 현실에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모색이다.
---「들어가며」중에서
흔히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은혜 받고 순종하려고 준비되어 있는 자세야말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우리는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시면 무엇이든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서 발견하고 맞닥뜨리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자신을 향한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이로 인해 정작 성경이 제시하는 내용을 등한시한다는 점이다.
---「1.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성경읽기의 목적이다」중에서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는 사람의 글인 성경에 접근할 때 누가가 취했던 것 같은 신중하고 철저한 공부와 연구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 신줏단지 취급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글이기에 문학적 양식을 검토하고, 앞뒤 문맥을 고려하고, 시대적 상황을 ‘자세히 미루어 살펴’ 연구하고 따지며, 검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하나의 해석일 수 있음을 인식하고 그렇게 표현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문자에 “아멘” 하고 그대로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또한 사람의 글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사람의 글이라고 해서 성경에 권위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은 사람의 글이지만, 이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깨닫고, 점점 온전케 되며, 선을 행할 능력이 구비된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글인 성경을 온전히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믿음으로 읽되, 철저히 공부하자. 문학적 형태를 검토하고, 본문의 배경과 형성에 대해 공부하고 궁리하자.
---「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사람의 글이다」중에서
본문에 대한 비판적 읽기의 또 다른 의미는 본문을 읽는 나 자신의 욕망과 탐욕을 가능한 배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꽤 많은 순간 성경은 탐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이삭도 부자였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는 재물의 축복을 받는다는 말이 여전히 신앙 공동체 내에서 공공연히 유포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네 교회는 부에 대한 탐욕을 정당화하면서 다만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충실히 할 것을 강조해 왔다.…이러한 것들은 기실 노골적인 탐욕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예배와 헌금이 수반되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으니, 어느새 우리의 신앙은 세상적인 탐욕을 종교적으로 세련되게 만들어 주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된 데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무비판적으로 읽어 온 것, 그리고 그렇게 설교되거나 가르치는 데 무비판적으로 “아멘” 해온 까닭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읽고 “아멘” 한 것도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탐욕을 채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판적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탐욕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정말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집중하려는 노력이다.
---「3. 비판적으로 읽기」중에서
본문의 다양성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우리가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으로 손쉽게 말하지 않고 각각의 경우에 참으로 합당하고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그에 비해 성경이 말하는 바에 대해 지나치게 자신 있고, 지나치게 정답을 확신한다고 여겨지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도리어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다양성에 대한 우리의 성찰은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긴장이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려 준다. 하나의 본문, 하나의 구절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다른 본문과의 비교 가운데 본문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4. 본문을 신학적으로 읽는다는 것」중에서
한국 교회가 흔히 역사의식이 없다고 비난받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구약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몰이해도 있지만 오히려 우리 역사에 대한 그릇된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는 성경을 바로 알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구약성경의 본문을 해석하여 오늘의 현실에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 성경 역사에 대한 공부와 동시에 오늘 우리 역사에 대한 공부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빠져도 성경 본문의 의미는 오늘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되기 어렵다. 달리 말해 역사에 대한 이해 부족은 본문이 구체화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5.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중에서
앞장에서 성경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역사를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본문을 적용하려는 오늘 우리 시대의 역사도 알아야 한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역사는 이 두 가지만이 아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역사는 우리 앞에 놓인 본문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에 관한 역사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본문이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며,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 최초의 본문이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는 점이 우리의 본문 이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6. 성경 본문의 역사」중에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설명할 때 곧잘 사용되는 표현 중 하나가 ‘율법과 복음’이다. 구약은 율법이며, 신약은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을 대표하는 두 인물로 꼽을 수 있는 아브라함과 다윗이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얻었음을 바울이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롬 4장)하는 점을 기억하면, 구약을 율법이라고 요약하는 것은 전혀 적절치 않다. 아울러 신약 안에도 그리스도의 제자 된 이들에게 요구되는 규례들이 있다(복음서 전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신약을 그저 복음이라고만 요약하기 어렵다. 구약이 든 신약이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고, 구약 시대든 신약 시대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회복된 이들에게 주어 진 영광스럽고 귀한 율법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7. 구약과 신약의 관계(1)」중에서
구약은 예수 안에서 폐지되었고 예수 안에서 다 성취되었다. 이것은 구약의 모든 말씀─언제나 보편타당해 보이는 도덕법이든 지금은 사라진 제의법이든─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사랑의 빛으로 해석되고 풀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의 빛으로 구약 제사 제도를 읽고 구약의 나라와 구조, 제도에 관한 법을 읽을 때, 구약은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늘에도 여전히 해당되는 규례와 법도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과제는 구약의 율법과 제도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진지하게 당시 상황 속에서 검토하고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의미가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자본주의에 기반을 둔 세속사회 속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으며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사랑의 빛 위에서 모색하는 것이다.
---「8. 구약과 신약의 관계(2)」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과 불연속적인 어떤 것, 완전히 근본적으로 바뀐 어떤 것을 가져오신 분이 아니라, 구약이 줄기차게 증거하고 선포하던 것이 공상이나 허황된 약속이 아니라 현실이요 실제임을 그 말씀의 ‘성취’를 통해 분명히 증거하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의 말씀은 살과 피를 가진 사실이요 현실임이 또렷해졌다. 구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든든하고 확고한 삶임을 깨닫게 된다.
---「9. 구약과 신약의 관계(3) 」중에서
구약에서는 ‘구원’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것인데, 신약에서는 내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다. 구약은 신약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구원’은 영원토록 죽지 않는 삶이나 금은보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휘황찬란하게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 그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건지심을 경험하는 삶을 가리킨다. 구약의 구원 개념을 곰곰이 따져볼 때,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신약 선포의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왕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 완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누리며 살아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부름받았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구약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그러한 구원의 삶으로 초대하신다.
---「10. 구약으로 읽는 신약 」중에서
‘사랑의 법’이야말로 신구약성경에서 언뜻 보기에 차별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것 같은 본문들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주어진 본문에 외견상 명백히 말하는 바가 있더라도, 때로 인접한 문맥을 고려해서 내려진 해석일지라도, 그 해석은 ‘성경 전체의 주장(사상)’에 근거하여 해석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본질적인 주장은 ‘사랑의 법’이다. 달리 말하면, 사랑의 법에 부합하지 않는 성경읽기와 이해는 본문과 일치하더라도 재고되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요일 4:8)이기 때문이다. ---「11. 시대를 초월하는 성경해석 」중에서
성경읽기의 목표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이끄시는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 목적이 나를 넘어서는 데 있는 걸까?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라는 제목을 듣고, 나를 넘어선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의 근본은 성경 자체가 증거하고 설교하고 주장하고 비유로 말하고 시로 말하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삶의 무게가 크고 힘겹다 보니, 이렇게 저렇게 원하는 것도 있고 바라는 것도 많다. 그래서 우리의 갈망과 욕망을 외부로 투사하여 이러한 것을 대신 만족시켜 줄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광야에서 시내 산 꼭대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던 백성들에게도 이러한 힘겨움과 막연함이 있었기에, 그들은 ‘자기를 위하여’(출 32:1, 8, 23, 31)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된 우리 역시 끊임없이 “이는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우리 하나님”(출 32:4, 8)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굳건히 말한다. 하지만 그 신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붙이든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든, 혹은 다른 어떤 신의 이름을 붙이든,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그것은 그럴싸한 이름을 지닌, 실제로는 우리 욕망을 투사한, ‘만들어진 신’, 내 욕망의 형상일 뿐이다. 초자연적 기적에 대한 믿음 역시 그 본질에는 욕망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은 우리 안에 있던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사는 ‘이 세대’(롬 12:2)가 끊임없이 자신을 본받도록 우리 안에 조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는 나를 혹은 현실을 초월하는 성경읽기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야말로 끔찍하고 힘겨운 우리 현실의 유일한 대답임을 믿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마치 우리가 아무 욕망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고 이 세대가 조장하는 욕망을 인정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이다. 구약 시대나 신약성경이 형성되던 시대, 그리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왔다. 강력한 능력자들과 초인들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볼 수 있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그 말씀을 읽으며 자신을 넘어서고, 우리 앞서 구름 같은 증인의 대열에 합류했다(히 12:1). 그래서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는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하도록 초청한다. 아니, 합류해야 한다고 강권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삶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 바로 그와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