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원수가 아닌 사랑으로 보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일이 될 수 있으나 천국 백성들의 경우는 그러한 세상 사랑의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이처럼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는 것은 칭찬받을 것이 전혀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A. 사람을 향한 사랑이 가치가 있으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랑 그 자체를 주셨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능력, 싫어하는 것을 혐오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됐습니다. 타락한 이후, 총명이 사라지면서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들을 사랑하는 오류는 생겨났으나 무엇인가를 사랑하고자 하는 인간 본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열렬한 사랑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으며, 특별히 신자는 그 사랑의 중심축이 하나님인 자들이고, 마땅히 그래야 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또한 ‘신자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부름을 받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 그 사랑은 어떤 종류의 것이 되어야 합니까? 사랑이란 어떤 대상을 목표로 삼고 그에게 끊임없이 붙어있고 그만을 즐거워하려는 마음과 정신의 작용입니다. 즉 사랑함에 있어서 그 대상이 최종적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며 불결하기 짝이 없는 자기 사랑일 뿐인 것입니다.
B.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함의 맹점 - 그 사랑은 확장된 자기 사랑일 뿐임: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러한 자기사랑의 즐거움 때문에 행하는 일이며, 그 대상을 향해 베푼 모든 수고와 희생과 양보는 엄밀히 말하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초과하지 않는 희생은 진정한 사랑에서 온 희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최종적으로 남는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면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사랑의 연장인 불결한 사랑, 이기적인 사랑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사랑할 수 없을 때도 많았지만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은 이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 줍니다.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서 그 사랑이 참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 자체가 사랑의 대상이 되게 하지 말고(이는 변형된 자기사랑일 뿐임을 앞에서 논증함)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단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사랑의 최종적 목표가 되는 것, 이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함
A. 희생: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희생이 뒤따르는 그런 사랑을 생각할 때 불쌍한 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는 영웅적이며 감상적인 사랑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자기희생에서 비롯된 실제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가 능히 사랑할 수 있는 자를 위해 큰 희생을 치루는 일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위해 아주 작은 희생을 치루는 일보다 훨씬 더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자신이 원하는 바이고, 후자는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쌍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가질 수 있는 막연한 희생의 정신과는 달리 가까이 있어서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자를 사랑하기 위해 행해야 하는 희생은 결코 감상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는 끔찍이 사랑하는데, 곁에 있는 단 한명은 왜 사랑하지 않을까요? 자기를 전적으로 포기하겠다는 마음 없이는 그런 종류의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의 희생으로 보이신 그분의 사랑은 세상에 속한 헛된 욕심과 자기를 향한 사랑을 버리게 합니다. (예-‘아버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20가지’를 적어온 아이들의 사연) 진정한 사랑은 나를 이해하고 나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전혀 이해해주지 않고, 오해와 미움이 가득한 사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손 내미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사랑의 진수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할 때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그 희생은 자기 죽음을 동반합니다. 자신이 끊임없이 죽지 않으면 결코 그 희생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일 만 명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사랑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자가 예수 사랑, 예수 죽음에 더 가까이 간 자입니다. 자신을 미워한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며 십자자의 희생으로 그 사랑을 먼저 보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들은 능히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과제-사랑할 수 없는 자들을 떠올리며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3가지‘를 적어보십시오.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문제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며 한 주간 실천해 보십시오).
B. 자기완성: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을 사랑할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자기완성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도 무한히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 받았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성화의 노력에 따라 전자가 증대되기도 하고 퇴화되기도 한다는 것인데, 전자가 증대되면 인간은 매우 추루한 영혼, 추루한 사랑을 가지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만을 사랑의 범주 안에 놓고 신앙생활을 하는 자는 결코 자기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신을 꺾을 단 한 번의 기회도 없이 성장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그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기완성의 삶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겪는 그 희생과 고통으로 자기를 꺾고, 죽이지 않는 한 그 길을 걸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할 가치가 없다는 여겨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자아를 붙잡고 눈물 흘리며, 아파한 적이 있습니까? 바로 그런 사랑을 배우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교회에 접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복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자기사랑의 충족이 아닌 그리스도로 인한 자기완성의 길이기 때문이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참으로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안에 이 사랑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이 사랑으로 망가진 세상을 고치며, 병든 사람들을 가슴에 안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나눔 1. 지난 한 주간 말씀에 순종하면서 느꼈던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나눔 2. 이번 주 말씀의 전체적인 내용을 나누어 보고 깊이 다가왔던 부분을 서로 말해 봅시다.
나눔 3. 사람을 향한 사랑이 가치가 있으려면 그 사랑의 출발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합니까? (마 22:37-47)
나눔 4. 예수님은 하나님께 등 돌린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화해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희생한 경험이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성공과 실패를 중심으로)
나눔 5. 미완성의 존재인 우리를 완성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가운데 깨달은 자신의 모습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출처 :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172414
이런 글 여기에 이렇게 올려도되나요...? 처음올려보는거라....
큭>_<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지상으로 파견된 우리 크리스쳔들ㅋㅋㅋ
이게 평생의 숙제인 거 같당 ㅋ
아마도 여기 올리는 건 '자유'라지?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