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교

장년
예람지기 2004.04.18 00:00:00
965
  • 일자
    2004-04-18
  • 설교
    손상률 목사
  • 성경
    창세기 41:25~43
 

성도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외모로 볼 때 똑같은 사람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지니는 특수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분별하면서 그 뜻에 맞추어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가집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기만 하면 심오한 하나님의 지식을 터득하게 되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신기한 지혜를 발휘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하나님의 신)이 임하시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면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4:26).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2:10).
오늘 여기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그들 앞에 전개될 시대의 징조와 상황을 정확하게 예언한 요셉입니다. 그는 비록 오랜 기간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신분이었으나,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으로서 바로 왕을 위하여 애굽의 모든 술객과 박수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명석하게 해결하였습니다. 요셉은 바로 왕이 꾸었던 꿈의 내용이 장차 칠 년 간 풍년이 들고, 이어서 칠 년 간 흉년이 겹치게 될 것을 보여준 계시임을 알려주고 여기에 대처할 훌륭한 정치를 하도록 주문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로 왕은 즉석에서 감탄하며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하였습니다(38절). 이처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도 그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맙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성도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받은 소임을 자신 있게 수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Ⅰ.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많은 사람 중에서 성도를 부르실 때 그들에게 선지자적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고 그를 선민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창 12:1-3). 훗날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을 소개하시면서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창 20:7).

(1) 선지자적 신분

선지자의 본래 이름은 선견자(先見者)라고 하였는데(삼상 9:9), 그것은 먼저 보는 자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먼저 보고 먼저 안 후에 이를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 된 자가 아는 지식은 세상의 과학적 지식이나 학문의 논리로 설명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의 계획과 그 행하시는 일들은 성령에 감동된 신령한 지혜가 아니고는 분별될 수 없는 성격의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요셉을 보고 하나님의 신에 감동 된 사람이라고 한 것이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을 보고 “그의 안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고 한 것은(단 4:8), 그들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학문적인 지식으로 말한다면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나 바벨로니아의 학자들을 능가할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왕도 느브갓네살 왕도 자기 주위에 있는 그 많은 박수 술객들보다 요셉과 다니엘이 훨씬 더 높고 깊은 지혜의 소유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13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고대 전제군주 국가에서는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나 황제에게 절대적인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로」는 애굽 왕의 칭호로서 보통 파라오(pharaoh)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시에 살아 있는 신으로 통하는 이름입니다. 문헌에는 파라오를 ‘인간 가운데 거하는 신이요 신들의 세계에 거하는 하나의 인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신적 직분을 맡아 행하는 하나의 인간인 동시에 애굽 백성과 우주의 신들 사이에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자’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허무맹랑한 이론을 바로 자신이나 당시의 사람들이 그대로 믿고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은 그런 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요셉처럼 바로 왕의 면전에서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하고 대담하게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25절). 자기가 신이고 세상 역사를 자기 뜻대로 주장한다고 생각해 온 바로 왕에게 감히 하나님께서 그 하실 일을 보여 주신 것이니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명철하게 일 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된다고 충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니엘도 바벨로니아의 군주 느부갓네살을 향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단 4:17). 바로 왕이나 느부갓네살 왕 같은 사람은 교만하여 자기의 권력으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착각하거나 또 그들의 백성들은 아닌 줄 알면서도 죽음이 두려워서 감히 바른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성령의 밝은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거침없이 증거 할 수 있습니다.

(3)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삽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면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미디안 대상들에게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누명을 씌워 감옥에 들어갔고, 거기서도 술 맡은 관원장에게 배신을 당하는 등 말할 수 없는 역경이 겹쳐졌으나 그 과정을 통해서 오늘 바로 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어느 하나도 사람의 의지나 계획대로 되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진행되어진 것입니다. 훗날 요셉은 그의 가족들 앞에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창 50:20). 하나님의 섭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선민의 역사에 중심이 되는 출애굽 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신약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救贖史)적인 경륜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Ⅱ. 세상의 흥망을 예견하는 자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도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교차된다고 하였습니다(전 7:14). 사람들은 짐승처럼 우매 한데가 있어서(시 73:22) 성공하는 사람은 언제나 거기에 도취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반대로 한번 실패한 사람은 그것으로 회복 불능이 되어 완전히 좌절하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1) 역사의 순환원리입니다.

솔로몬 왕은 그의 전도서에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온다”고 하였고, 해는 떴다가 그 떴던 곳으로 돌아가며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킨다고 하여 세상만사가 순환되고 있음을 말했습니다(전 1:4-6). 인간 역사에 있어서 한 번 이긴 자가 계속 승자가 되고 한 번 넘어진 자가 계속 패자로 남는다면 인류는 폭군들의 천하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공과 실패를 번갈아 오게 하여 역사의 균형을 유지하게 하십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 쉽게 알아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신으로 감동되게 하시고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렘 1:10). 그리고 그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두 가지를 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살구나무 가지와 끓는 가마를 보았습니다. 전자는 죽은 가지에 움이 돋고 소생하는 희망의 메시지요 후자는 끓는 가마가 쏟아지는 심판의 경고였습니다(렘 1:11-13).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그 백성에게 회복과 파멸의 역사를 예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로의 꿈도 성령 받은 요셉은 쉽게 알아내었습니다. 두 가지 꿈이 다 같은 것으로써 처음 칠 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가 다음 칠 년은 흉년으로 궁핍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심입니다.

다니엘 2장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본 꿈 이야기가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는 그 내용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는 바벨론에 있는 모든 박수와 술객을 동원하여 그 꿈을 알아내고 해몽을 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이를 알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고 하였습니다(단 2:11).
그렇지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 내용뿐 아니라 그 해몽까지 명쾌하게 내어놓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에 본 신상은 정금으로 된 머리와, 은으로 된 가슴과 팔, 구리로 된 배와 넓적다리, 그리고 철로 된 종아리와 진흙과 철이 섞인 열 발가락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바벨론 이후에 일어나게 될 나라들로써 정금 머리는 바벨론이요, 은으로 된 가슴과 팔은 메데 파샤이며, 구리로 된 배와 넓적다리는 희랍을 뜻하고 철로 된 종아리는 로마를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고 있지만 모두 다 그 다음 세력에 의해서 몰락했으며, 결국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아니한 뜨인 돌에 의하여 산산조각 나고 마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세상 나라는 하나 같이 흥하고 망하는 원리를 보여줍니다. 최후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전히 없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3) 겸손히 주의 뜻을 준행하여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부귀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야 됩니다. 한번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왕궁의 지붕 위를 거닐면서 그가 누리는 권세와 영화에 도취된 나머지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4:30-31에 보면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그는 왕궁에서 쫓겨나 칠 년 동안 들판을 헤매며 소처럼 풀을 뜯어먹고 살았습니다.
훗날 그가 맑은 정신이 돌아와서 왕위에 복위되었을 때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능히 낮추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37절).
사실 이 일이 있기 전에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로부터 그 꿈의 해석을 들으면서 중요한 충고를 받았습니다.
다니엘은 그 때 왕을 향하여 앞으로 왕이 쫓겨 날 것과 정신을 잃고 짐승처럼 될 것을 예고하면서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하고 간했습니다(27절).

 

Ⅲ. 증거자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신으로 감동하게 하실 때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며 사람들에게 증거자가 되게 하십니다. 요엘 2:28에는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약속대로 오순절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 때 거기서 감동 받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행 2:4).

(1) 하나님의 뜻을 증거합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요셉의 꿈 해석과 그 대응하는 가르침을 듣고 그 자리에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하였습니다. 바로의 말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하고는,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세마포 옷을 입혀 주며 목에 금사슬을 걸어주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요셉에게 「사브낫 바네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사브낫 바네아(Zaphenath - Paneah)라는 말은 ‘신은 말씀하시고 자기는 그의 뜻에 따라 산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바를 좇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헤아리면서 그 뜻을 나타내고 시행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빌 1:20-21).

(2) 공의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1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곧 진리를) 구하는 자이며 또한 공의를 행하므로써 그것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요셉은 총리가 된 다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계시에 의하여 칠 년 간 풍년이 들었을 때, 그것을 낭비하거나 사치하지 않고 오히려 애굽 전역에 창고를 짓고 곡물을 쌓아 두어 훗날을 대비하였습니다. 이어서 칠 년 간 흉년이 들었을 때는 그것을 백성들에게 공정하게 배급해주었습니다. 그는 또 백성들로부터 받은 토지를 국유화시키는가 하면 그때부터 애굽에 토지법을 정하여 소출의 오분 일을 나라에 상납하게 하는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창 47:26). 바로 왕은 요셉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며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고 하였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겸손하고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미가 6:8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3) 축복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요셉을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표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파란만장했던 요셉의 생애가 예수님의 삶을 나타내는 그림자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8-11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열 일곱 살 때 형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던 요셉이 말할 수 없는 역경 가운데서 죄를 멀리하며 승리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창 39:9) 증거자로서 소임을 다했기에 훗날 모든 사람이 그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고 축복의 간증자가 되었습니다.